[LETS 기획취재] 4회 농촌과 농민을 살리는 춘천녹색화폐

지역화폐 ‘레츠’가 실물경제에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앞서 소개한 대전 한밭레츠나 서울시 마포구 사례는 일정 부분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를 대신하려는 대안경제 성격보다는 품앗이 등을 통한 풀뿌리 공동체 운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레츠가 실물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레츠의 발생지인 캐나다 코목스 발레를 비롯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레츠가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무너져 가는 지역경제를 살려낸 사례는 많이 있다.

 

문제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 국가가 국가화폐의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레츠가 실물경제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지난 2012년 실물경제 수단으로서 레츠의 가능성을 실험한 의미있는 도전이 있었다. 강원도 춘천녹색화폐가 그 주인공인데, ‘쌀본위제’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통해 농촌 지역 공동체 경제 복원의 가능성을 엿보여 줬다.

 

 

■ 신용창조라는 허구 뒤에 감춰진 잔혹함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돈이 우리 삶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금본위제도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금본위제도는 화폐단위의 가치와 금의 일정량을 교환할 수 있는 제도다. 은행에 돈을 가져가면 액면가만큼 실제 금과 바꿔줬다. 사람들은 금의 가치를 바탕으로 돈을 거래할 수 있었다. 금이 화폐 가치를 보증하는 실체고 돈은 그것을 표시한 것에 불과한 셈이다.하지만 20세기 들어서면 발생한 대공황과 세계전쟁으로 인해 금본위제도는 흔들렸다. 세계경제가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종이돈 대신 실제 금을 확보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은행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줄 만큼 충분한 금이 없었다. 금본위제도는 그렇게 맥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영리한 은행가들은 금 대신 ‘신용창조’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어 냈다. 현대 자본주의가 가진 많은 병폐가 바로 이 신용창조에서 비롯됐다.

신용창조는 말 그대로 ‘무(無)’에서 인위적으로 신용을 만들어 낸다. 금본위제도는 적어도 금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현대 금융이 만들어낸 신용창조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내며 신용을 창조한다. 중앙은행에서 만드는 법정통화 외에 다른 화폐는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신용을 강제하는 것이다.

 

 

신용창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가령, 은행에 1억원의 돈이 있다 치자. 은행은 1억원에서 고객들의 인출에 대비한 금액 1천만원(10%)를 남겨두고 나머지 금액 9천만원을 대출해준다. 그리고 다시 9천만원의 10%를 제외한 8천100만원을 다른 고객에게 또 대출해준다. 이 거래는 실제 돈이 오가는 것은 아니고 통장에 숫자만 찍힌다. 이런 방식으로 은행은 1억원의 종자돈을 활용해 9억원이라는 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신용창조가 불러온 마법이다.이 과정에서 은행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자산을 9배로 뻥튀기 하고 대출자들에게 이자를 받아 챙긴다. ‘이자’의 존재는 현대 화폐 시스템이 갖는 가장 고질적인 문제다. 이자로 인해 돈을 버는 자는 계속 벌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가령, 1천만원을 연리 5%의 복리(이자에 이자가 붙는 것)로 빌렸다면 15년 후에는 원금의 두 배인 2천만원을 갚아야 한다.

 

 

■ 삶의 근본, 쌀을 지켜야 한다는 간절함춘천녹색화폐는 신용창조라는 현재 화폐 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아무런 실체도 없는 ‘신용’ 대신 실제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쌀’을 신용의 밑받침으로 사용했다. 금본위제도가 금의 가치를 바탕으로 화폐를 교환했듯이 춘천녹색화폐는 쌀의 가치를 바탕으로 레츠를 거래했다.

춘천녹색화폐센터 한재천 센터장은 “지금 화폐라는 게 근본이 없습니다. 신용창조라고 하는 것은 거품에 불과합니다. 이런 시스템 위에서 강원도 밖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연간 4조원 규모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지역경제는 계속 불황에 시달리고 시중에 돈은 돌지 않는 상황이 계속된 겁니다.”라고 말했다.

4조원이나 되는 돈을 지역 안으로 끌어들여 순환경제를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바로 레츠였다. 여기에 농업이 주산업인 춘천 지역의 특성을 살려 우리나라 최초의 쌀본위 지역화폐인 ‘춘천녹색화폐’를 만들었다.

 

 

 

한 센터장은 “정부는 쌀을 지키려는 의지가 전혀 없고 시중에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수입쌀이 들어온 상태입니다. 지금 쌀 농사 지어서는 수지타산을 맞힐 수가 없고 시골에 귀농하는 젊은 친구들도 밭농사 하지, 쌀농사는 안 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가게 되면 쌀도 밀처럼 됩니다. 어떻게 해서든 쌀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쌀본위 지역화폐를 만들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춘천녹색화폐는 ‘이삭’이란 이름을 갖고 있다. 2012년 하반기에 ‘1천 이삭’ 단위 화폐 6천장을 시범적으로 유통시켰다. 1천 이삭은 쌀 1천원의 가치를 담고 있다. 가격은 가맹점들과 함께 잡은 것인데 시중의 도매가와 소매가의 중간 정도로 잡았다. 유기농 쌀 10kg을 기준으로 할 때 도매가가 2만8천원, 소매가가 3만2천원 정도인데 춘천녹색화폐 쌀값은 3만원으로 잡은 셈이다.소비자가 지역화폐를 취급하는 가맹점에서 현금 1천원을 주면 1천 이삭을 받고 이것을 바탕으로 거래를 하게 된다. 가맹점은 30군데 정도 되는데 6개월 동안 돌고 돈 이삭은 최종적으로 쌀로 정산하게 된다. 모아진 이삭 만큼 춘천녹색화폐센터에서 쌀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렇게 6개월 동안 거래된 이삭의 화폐 가치는 700만원 안팎 정도였다. 80kg 쌀가마로 치면 30가마 정도. 두 농가에서 재배한 쌀이 사용됐다.

거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농촌 지역에서 쌀값 안정을 위한 대안의 하나로 지역화폐가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춘천녹색화폐는 이 때 경험을 바탕으로 강원도에 지역화폐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다만, 강원도의 경우 쌀본위 방식은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강원도는 광역자치단체로써는 처음으로 행정 차원의 지역화폐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다. 가칭 GWCC(지더블유시시. GangWon Community Currency)로 이름붙인 시스템이다. 줄여서 강원(GW)으로 부르는 이 지역화폐는 ‘1강원’이 ‘1천원’의 가치와 동일하게 운영될 예정이다. 국가통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역화폐 ‘강원’은 2년의 유효기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화폐를 금고 속에 고이 보관해봤자 쓸모 없다는 의미다. 지역 안에서 2년의 생애 또한 줄기차게 돌고 돌 때만 의미가 있다.

강원도는 지역화폐 강원이 유통되면 △경기침체 완화 △지역경제 활성화 △자립성장 기반구축 △환경 및 생태 보호 △지역공동체 회복과 사회안전망 확충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국가통화는 수익성이 높은 시장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쉽게 빠져 나가지만 지역화폐는 이러한 이동을 차단하고 지역 내 순환경제를 만들 수 있다. 이에 따라 물품과 서비스의 이동이 자연스럽게 지역이라는 공간으로 한정되면서 불필요한 자원 낭비와 환경오염을 줄일 수 있는 것이다.

강원도는 오는 5월까지 ‘지역통화 도입 및 활성화 지원조례’를 만들고, 6월에는 지역화폐 발행과 유통, 홍보, 교육 등의 업무를 담당할 강원지역통화센터를 설립키로 했다. 강원도 사회적 경제과 지역화폐 담당자는 “지역화폐가 정착되면 자본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을 최소화하고 지역 주민들이 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을 사용하는 등 지역제품 구매 활성화를 통해 지역경제가 활성화 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춘천에서 진행된 6개월의 짧은 실험은 단 한번으로 끝났다. 주체들의 역량이 아직은 부족했고 위폐 방지 등 기술적 문제도 걸림돌이었다. 이 같은 이유 등으로 춘천녹색화폐는 지역화폐의 빠른 정착과 확산을 위해 행정과 손을 잡았지만 당초 목표로 한 쌀본위제도의 취지는 살리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춘천의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역화폐가 단순히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몽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역을 기반으로 실물경제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강원도 전체 사회적 경제 차원으로 확산됐다는 점도 유의미한 대목이다. 한 센터장은 “토대만 튼튼하다면 지역화폐도 충분히 실물경제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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